곤도 이사미
[clearfix]
1. 소개
일본 에도 시대 말기 인물. 천연이심류의 네 번째 후계자이자, 신센구미 2대 국장이다.
2. 곤도 이사미의 일생
원래 이름은 미야가와 카츠타(宮川勝太).
무사시노쿠니(武藏國) 타마군(多摩郡), 오늘날의 도쿄도(東京都) 쵸후시(調布市)에서 부농 미야가와 히사지로의 3남으로 태어났다. 타마는 쇼군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지로 세금이 낮고, 부농이 많았다. 그래서 쇼군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고, 농민의 자식들도 도둑들로부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신변안전을 위한 호신술로 검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16세 때, 에도에 도장을 열고 있던 곤도 슈스케(近藤周助)의 강한 요청에 따라 곤도 가의 양자로 들어가 천연이심류의 후계자가 된다. 여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집에 도적이 침입하자 치고 나가려고 하던 형을 붙들고 '지금은 막 침입한 참이라 경계심이 강할 텐데, 다 털고 물건을 짊어지고 나갈 때는 경계가 풀어질 테니 그때 기습해야 한다'고 하며 막은 뒤에, 그 말대로 턴 물건을 짊어지고 나갈 때 기습해 도적을 격퇴한 후에는 쫓아가려는 가족들을 말리면서 '궁지에 몰린 쥐는 쫓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쫓아가면 크게 다칠 수 있다. 물건은 어차피 찾았으니 됐다'고 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근방에 퍼지자 이를 듣고 곤도 슈스케가 양자로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는 것. 1861년 8월의 일이었다.
그 후, 히지카타 토시조를 비롯하여 오키타 소우지, 이노우에 겐자부로 등 천연이심류 문하의 사람을 가르쳤고[2] . 식객 중에서도 나가쿠라 신파치, 토도 헤이스케, 하라다 사노스케, 야마나미 케이스케 등과 관계를 맺어, 이들을 전부 신센구미 간부가 되게 만들었다.
1863년, 28세 때 시위관 생활 도중에 섬길 영주를 잃은 낭인 무사대 모집에 응모하여 막부파의 아이즈번의 자금으로 신센구미를 결성, 귀신 잡는 혹은 사람 잡는 곤도란 명칭으로서 존왕양이 세력들에게 경악과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철저한 유신박해에 앞장섰다.
그 와중에 히지카타 토시조, 오키타 소우지와 함께 최초의 국장이었던 세리자와 카모를 참살한 후 내부에서 숙청을 감행했다. 그로 인해 이토 카시타로 등 여러 국장의 도전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였다.[3]
도바 후시미 전쟁에서, 전쟁 전에 암살당한 전 참모, 이토 가시타로의 잔당들에게 습격당하고 그들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에도로 돌아와 상처를 회복한 이사미는 갑양진무대를 결성, 에도로 진군하는 관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후성(甲府城)에서 농성전을 벌이고자 에도를 출발하지만 고후성은 이미 관군에게 투항한 상태였고, 입성 후 농성전만 생각하였던 갑양진무대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채 관군과 격돌하게 된다. 압도적인 병력차가 났던 데다가 갑양진무대는 말만 군대일 뿐이지 신선조 잔당과 무뢰배들을 모아 급조한 집단이었던 관계로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못하고 대원들이 이탈하는 등 스스로 무너지며 대패하고 만다.[4] 이 전투 이후 신센구미 초기 멤버였던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등이 이탈하고 오키타 소우지는 병이 깊어져 신센구미를 떠나는 등, 사실상 신선조는 소멸되고 만다.
곤도 이사미는 나가레야마(流山)에서 재기를 도모, 남은 40여 명의 인원에게 체계화된 전투 훈련을 시키며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1868년 4월, 에도에 진군한 관군에게 거처가 포위되었고, 곤도는 자결을 결심하나 살아서 기회를 노리라는 히지카타 토시조의 설득에 자결을 포기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받은 이름인 '오쿠보 야마토'라는 이름으로 관군에 투항한다.
처음에 관군은 그의 정체를 몰랐으며 곤도가 막부의 중신 오쿠보 야마토를 자처하자 막부의 중신을 대하는 태도로 체포 후 정중하게 호위가마에 태워져 이타바시(板橋)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후 관군 중에 신선조 시절 그의 밑에 있었던 자가 나타나자 그 정체가 들통나게 되는데 곤도의 얼굴을 아는 자가 "곤도 씨 오랜만입니다" 라고 하자 곤도는 당혹스러워하며 "무슨 소리요 나는 오쿠보요." 라고 부인하였으나 바로 뒤이어 "에이 콘도 씨 왜 그러세요. 농담하지 마세요" 라고 대꾸당했고 이에 곤도는 극도로 당황하여 결국 그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고 한다(...). 정체를 숨겼다는 비난과 함께 동정론마저도 사라져서 그 후, 카츠 카이슈가 선처를 바라는 탄원을 낸 것도 무색하게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 범인이 신센구미라고 알고 있었던 도사 세력들의 주도로 아무런 예로 갖추지 않은 채 일반 죄인 취급을 받으며 참수형에 처해진다. 목은 교토의 산조(三條) 강변 모래 밭에 효시(梟示)되었다.
지세이는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 지세이로 보아 단순한 무사로 보기엔 상당한 한학 지식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孤軍援絶作囚俘 顧念君恩涙更流
一片丹衷能殉節 雎陽千古是吾儔
외로운 군대, 원군도 끊겨 포로가 되었으니, 돌이켜 임금[5]
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눈물만 흐르는구나.한 조각 단심으로 능히 절의에 순사하니, 천고에 전해지는 휴양[6]
이 바로 내 동지일지니.
여담으로 1913년 야마다 오토네라는 여인이 나가쿠라 신파치를 찾아와 자신이 곤도 이사미의 딸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친딸인지는 진위여부 판단이 불가하며, 손녀라는 이야기도 있다.靡他今日復何言 取義捨生吾所尊
快受電光三尺劔 只將一死報君恩
적에게 항복하여 지금 새삼 무얼 말하리. 의를 취하고 목숨을 버림이 내가 귀하게 여기는 바이니,
쾌히 전광석화와 같은 세 척의 검을 받아, 그저 장렬하게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 한다.
비록 아들이 없어 대는 끊겼지만 딸, 타마를 통해 자손이 이어졌다. 손녀들 중에는 '''한국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룬 사람이 있다.
콘도 이사미의 본가인 미야가와 가문은 아직도 대가 이어지고 있다.
[image]
미야가와 가문 제10대 당주 宮川豊治 (미야가와 토요지) 씨. 꽤 닮은 것 같다.
3. 곤도 이사미와 코테츠
'''오늘밤 코테츠는 피에 굶주려 있다(今宵の虎徹は血に餓えている)'''라는 대사로도 유명하지만 본인이 말한 것은 아니고 후세의 창작이다.[7]
그의 애검은 나가소네 코테츠 오키사토(長曽禰虎徹興里)[8] 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품인지는 알 수 없다.
우선 코테츠 자체가 매우 유명하고 또 인기있었기 때문에 사기목적, 혹은 생계를 위하여 코테츠의 위조품을 거래하는 경우가 몹시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선 코테츠를 보면 가짜라고 생각하라는 말도 있으며 코테츠의 위조품만을 연구한 서적도 존재한다.
코테츠의 위조는 대략 3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우선 첫째가 소모되거나 부러져 쓸 수 없는 일본도를 재생한 것, 그리고 둘째가 비슷한 일본도의 이름을 지우고 코테츠의 이름을 넣은 것, 그리고 세 번째가 도공이 처음부터 코테츠의 위조품을 만든 경우이며 곤도 이사미의 코테츠는 그중에서 2번에 해당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동시대의 명도공인 미나모토 키요마로의 명품을 누군가가 값을 올리기 위하여 코테츠로 이름을 바꾸어 넣었고 그것을 곤도 이사미가 입수했다는 것.
그러나 본인은 굳게 진품이라고 믿었으며 이케다야 사건의 후에 자신의 양아버지에 보낸 서신에서도 자신의 검은 코테츠이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쓴 것이 아직도 남아있다.[9] 곤도 이사미의 코테츠가 진품이라는 설은 우선 장군가, 즉 도쿠가와가에서 하사받았다는 것인데 그렇게 근거가 있는 설은 아니다. 우선 곤도 이사미의 코테츠는 어떠한 경위를 거쳐서 입수했는지가 불분명하며 만약 장군에게서 하사받았다면 그것은 대단한 명예임에도 공식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두 번째는 코테츠는 코테츠라도 코테츠의 양자인 2대 코테츠가 만든 것이라는 것으로 이건 그나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세 번째는 사이토 하지메가 어디선가 가져왔다는 것이지만 신뢰성은 없다.
이렇게 곤도 이사미의 코테츠는 사연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시바 료타로의 소설 신센구미 혈풍록에서 소재로 사용한 적도 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신선조 혈풍록에서는 곤도 이사미가 전부 3자루의 코테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 2자루는 진품이지만 정작 (가장 잘 베이던)가짜를 애용한 것으로 나온다. 시바 료타로의 또다른 소설 타올라라 검에서는 교토로 가기 전에 도장문을 닫으며 가산을 털어서 일대의 칼 상인들에게 코테츠를 찾게 해서 입수한 것으로 묘사된다.
4. 그 외
입이 얼마나 큰지 입 안에 주먹이 다 들어갔다고 한다. 본인도 남들에게 은근히 자랑한 듯. 이건 원래 가토 기요마사의 특기였으나, 그를 평소에 존경하였다는 곤도가 무던한 연습을 통해 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하드라마 신센구미에서 콘도 이사미 역을 맡은 카토리 싱고가 그걸 자주한다.[10]
바람의 검심 추억편에서도 등장. 성우는 타카하시 히로시/장광. 검심재필 표지에 그린 설정에 보면 신입 대원들과 가까워지고 싶은데 그들이 국장인 자신을 어려워하고 긴장하는 것에 고민 중이었다고 나온다. 홋카이도편에서도 나가쿠라 신파치가 지어낸 이케다야 사건 회고에서 짤막하게 나온다. 나가쿠라 왈 켄신이 오키타 소지와 사이토 하지메와 대결한 뒤 곤도와 한판 대결을 벌이는 전개가 재미있을거라며 회고록을 지어내려 하다가 켄신과 하지메가 태클을 걸었다. 역사대로 근육질의 거한으로 묘사되는데, 공식적으로 신선조 최강인 소지나 하지메 다음 상대로 언급된 걸 보면 곤도도 꽤나 강했던 모양. 바람의 검심에서 히지카타 토시조가 "검술은 보통이었지만 실전에 능했다"고 회상되는 걸 보면 곤도 역시 그러한 타입의 인물이었을 걸로 보인다.[11] 나가쿠라 말로는 곤도나 히지카타, 타카스기 신사쿠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혼자서 천명을 베는 일기당천이 아니라 아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천명의 적을 물리치는 일기당천의 강자였다고.
슈퍼닥터 K에서는 뇌에 문제가 생겨 성격이 포악해진 배우가 등장하는데, 거칠어진 성격탓에 평소 못했던 악역을 화끈하게 해내자 뇌수술마저 거부하고 악역연기에 매달리게 되고[12] 인기가 절정에 올랐을 때 맡은 배역이 료마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의 곤도 이사미 역이었다.
그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는 은혼의 곤도 이사오가 있다. 원본인 이사미도 고릴라처럼 느낄 정도로 남자다운 호걸인 터라(말하자면 마초) 싱크로율이 다소 높다.[13] 다만 이사오는 한 여자에게만 스토커적인 집착을 보이는 반면, 이사미는 많은 여자에게 인기가 있었다는게 차이지만.
4.1. 콘도 이사미가 등장하는 미디어 목록
4.1.1. 만화
4.1.2. 드라마
4.1.3. 애니메이션
4.1.4. 영화
4.1.5. 게임
배우 후나코시 에이이치로가 페이스 모델이자 성우로 등장. 어째 국장이면서 상당 기간 신센구미 둔영에 얼굴도 안 비치며 유곽에서 농땡이나 피다가 7장에서 료마의 정체를 파악해 둔 채 "자신의 계획"에 참여하면 복면의 남자에 대해 알려주겠다며 꼬시지만 료마가 거절하자 자신이 바로 복면의 남자라고 구라를 치고 보스로 등장한다.
참고로 그의 계획은 다름아닌 교토 방화로써 신센구미는 교토 치안유지는 페이크고 사실 교토 방화를 위한 행동대다. 동기는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서라곤 하나 당연히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게 뻔해서 료마의 설득으로 그만두지만 결국 교토 방화를 노린 흑막에 의해 이토 카시타로가 계획대로 방화를 실행, 본인은 흑막이 보낸 오카다 이조의 피습으로 "설마 교토를 불태우길 포기했는데 교토를 불태운 남자로 역사에 남을 줄이야..."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참고로 그의 계획은 다름아닌 교토 방화로써 신센구미는 교토 치안유지는 페이크고 사실 교토 방화를 위한 행동대다. 동기는 나라를 개혁하기 위해서라곤 하나 당연히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게 뻔해서 료마의 설득으로 그만두지만 결국 교토 방화를 노린 흑막에 의해 이토 카시타로가 계획대로 방화를 실행, 본인은 흑막이 보낸 오카다 이조의 피습으로 "설마 교토를 불태우길 포기했는데 교토를 불태운 남자로 역사에 남을 줄이야..."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 재배소년(일본판) - 신센구미 씨앗에서 국장 이사미로 등장한다.
- 학원☆신센구미 - 모에선 맞은 것만 빼고 원 이름 그대로 등장한다.
- 크래시 피버 - 다행히 모에선을 피하고 원 이름 그대로 등장했다.
- 사무라이의 길 4 - 신센구미 DLC 시루베의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면 첫번째 암살대상으로 등장한다. 사용 유파는 Goshi swordfighting이며 당연히 마스터급. 강베기로 시작하는 연속 공격 Garyu taito가 흉악하게 데미지가 높고[15] , 들고 있는 검 코테츠는 기본으로 위력이 250을 넘는 데다가 활력이 0이 되기 전까지는 철벽이라면서 생명력이 줄지도 않는 괴물. 문서 최상단의 사진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비주얼을 하고 있으며, 쓰러뜨리면 코테츠를 드랍하고 그의 얼굴, 복장, 헤어 스타일을 언락할 수 있게 된다. 일단 활력만 다 깎으면 생명력은 쉽게 깎여서 연속공격만 주의하면 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편이다.
[1] 표정이나 몸짓이 꽤 불쾌해 보이는데, 사진 찍을 당시 정말로 그랬다고 한다. 당시 사진 기술이 열악하여 얼굴이 제대로 나오려면 얼굴에 허옇게 분칠을 하는 등 준비가 워낙 거창하고 1장 찍으려면 15분 정도 걸릴 정도로 시간도 오래 걸렸는데, 그 때문에 있는대로 짜증이 난 상태에서 찍은 터라 표정이 저 모양이었다고 한다.[2] 특히 오키타 소우지는 곤도 이사미의 수제자였다.[3] 이런 와중에 곤도가 조직 내의 정보를 관리하고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간첩으로 활약시킨 이가 바로 사이토 하지메였다.[4] 당시 이들의 상대들 중 하나에는 훗날 자유민권운동가인 동시에 정한론자인 이타가키 다이스케(당시 총독 겸 대대 사령)도 있었다.[5] 여기서는 쇼군을 뜻한다.[6] 중국의 지명. 안녹산의 난 때 이곳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한 충신 장순(張巡)을 비유하여 일컫는다. 곤도가 자신의 처지를 장순에 비유하는 이유는, 장순은 항전하다 잡혀 처형당했기 때문.[7] 신센구미가 교토의 이케다야라는 여관에 있었던 유신지사들을 습격한 이케다야 사건 때 했던 말로 설정되어있다. 오다 노부나가 의 "어쩔 수 없군"만큼이나 유명한 대사로 많은 창작물에서 패러디되곤 한다. 일례로 다이쇼 야구 소녀의 츠쿠바에 토모에 는 밤에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가 '길거리 타자'로 유명 중학교 투수들의 공을 치며 이 대사를 내뱉기도 했다.[8] 코테츠는 장인 나가소네 코테츠가 만든 일련의 검들을 통털어 이르는 것으로 현대로 치면 일종의 브랜드명이다.[9] 이케다야 사건 때 다른 대원(오키타 쇼지 포함)들의 검은 휘어지거나 부러져 있었는데 멀쩡한 것이 곤도 이사미의 검 하나뿐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그냥 곤도 이사미가 싸울 때 상대의 검과 검을 서로 부딪치는 불필요한 동작을 거의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사용하는 검이 명검이든 아니든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평범한 검도 명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인 셈.[10] 참고로 싱고는 연예계 활동 초기 당시 그게 원래 특기였다고한다.[11] 실제 역사에서는 이케다야 사건 당시 선봉으로 뛰어들어 날뛰었으면서, 오키타나 나가쿠라가 부상을 입는 와중에도 혼자 멀쩡했다는 일화가 있어 숨은 강자 취급받기도 한다[12] 사실 기절해 있을때 이미 K가 수술을 끝낸 뒤였지만 그의 성공을 위해 아내가 일부러 함구하고 있었다.[13] 성격도 닮은 편. 둘다 사람을 잘 믿는 편이다.[14] 거의 소개 수준이지만..[15] str 510. 유파 특수능력 중 적 공격력을 줄여주는 걸 가장 좋은 걸로 장착해도 50% 데미지가 들어오며, 기본 유파인 무신류의 경우 그냥 죽는다.